루도비쿠스 2세 이우니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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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도비쿠스 2세 이우니오르는 825년 로타르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탈리아의 공동 국왕을 거쳐 850년 황제에 즉위했으며, 사라센의 침략에 맞서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바리(Bari)를 탈환하는 등 이탈리아를 수호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동생 로타르 2세의 이혼 문제, 교황과의 갈등, 베네벤토 공작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875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서프랑크의 카를 2세가 황제관을 차지하고, 이탈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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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쿠스 2세 이우니오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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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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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 2세 |
로마자 표기 | Ludovicus II Iunior (라틴어), Ludwig II (독일어), Ludovico II (이탈리아어) |
출생일 | 825년 |
사망일 | 875년 8월 12일 |
사망 장소 | 이탈리아 왕국, 게디 |
매장 장소 | 밀라노, 산탄브로조 성당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통치 | |
칭호 | 로마인의 황제 |
재위 기간 | 844년 ~ 875년 (855년까지 로타르 1세와 공동 통치) |
대관일 | 844년 6월 15일, 로마 |
선임자 | 로타르 1세 |
후임자 | 카를 2세 |
이탈리아 왕 | |
재위 기간 | 839년 ~ 855년 (844년부터 공동 통치) |
가계 | |
왕조 | 카롤링거 왕조 |
아버지 | 로타르 1세 |
어머니 | 에르멘가르트 드 투르 |
배우자 | 엔겔베르가 |
자녀 | 에르멘가르트, 프로방스 왕비 기젤라 |
2. 생애
루도비쿠스 2세는 황제 로타르 1세와 투르 백작 위그의 딸 에르망가르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39년 이탈리아 왕으로 책봉되었고, 844년 6월 15일 로마에서 교황 세르지오 2세에 의해 대관식을 올렸다.[9] 850년에는 교황 레오 4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서도 대관식을 올렸다.[9]
855년 9월, 아버지 로타르 1세가 사망하면서 중프랑크 왕국이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 통치권을 상속받아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권위는 카롤링거 제국 전체에 미치지 못했고,[10]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권도 북쪽 절반에만 한정되었다.[11]
839년 이후 남이탈리아 베네벤토 공국에서는 계승 분쟁이 발생했고, 이슬람교도들이 바리에 이슬람 국가를 세웠다. 846년에는 이슬람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고,[12] 로타르 1세는 이탈리아로 침입하는 이슬람 세력에 대처해야 했다. 847년 루트비히 2세는 이슬람교도들을 베네벤토에서 몰아냈고, 849년 로타르 1세의 중재로 베네벤토 후국이 분할되면서 베네벤토 계승 문제는 해결되는 듯했다.[13] 그러나 이후에도 남이탈리아에는 이슬람 군대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871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바리를 탈환했지만, 동로마 제국의 협력이 필요했기에 873년 남이탈리아에서 바실리우스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12]
863년 동생 샤를이 상속인 없이 사망하자, 그의 영토는 루트비히 2세와 로타르 2세 사이에 분할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아를, 엑스, 앙브랑의 각 주교구와 프로방스 왕위를 획득하여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하였다.[9] 869년 동생 로타르 2세도 적출자 없이 사망하였으나, 이때 루트비히 2세는 이슬람 군과의 전투 때문에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었고, 로타르 2세의 유산인 로타링기아(로렌)는 그의 삼촌인 서프랑크 왕 샤를 2세에게 빼앗겼다.[9] 이후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도 상속권을 주장하여, 870년 메르센 조약에서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 사이에 분할되었다.[14]
875년 8월 12일, 루트비히 2세는 남자 상속인 없이 이탈리아 구비오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후계자로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를 선택했으나,[15] 이탈리아 왕국 및 로마 황제의 지위는 교황 요한 8세의 지지를 얻은 서프랑크 왕 샤를 2세가 획득하였다.[14]
2. 1. 어린 시절
루도비쿠스 2세는 825년 11월 1일 이탈리아 북서부 게디(Ghedi)에서 로타르 1세와 투르의 이르멘가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3][4] 같은 이름의 삼촌과 구별하기 위해 황제 루트비히,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로도 불렸으며, 청년 루트비히라는 별칭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별명을 가진 사촌 작센 군주 루트비히 3세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보통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라고 불렸다.839년 이전까지 그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할아버지인 경건왕 루트비히의 궁정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839년, 아버지 로타르 1세에 의해 이탈리아의 공동 국왕으로 임명되었다.
840년, 사라센인들이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를 공격하여 타란토를 함락시켰는데, 이때 타란토 주민들은 이미 다른 지역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이후 타란토는 당분간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844년 6월 15일, 루도비쿠스 2세는 로마에서 세르지우스 2세 교황에 의해 아버지 로타르 1세의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 경건왕 루이(각각 루도비쿠스 2세의 증조부와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2. 2. 이탈리아 왕 즉위
839년 이탈리아 왕으로 책봉되었고, 844년 6월 15일 로마에서 교황 세르지오 2세에 의해 대관식을 올렸다.[9] 그는 로마에서 황제의 권리를 주장했으나 교황 세르지오는 단호히 거절했다. 850년에는 교황 레오 4세에 의해 로마에서 공동 황제로서도 대관식을 올렸다.[9]850년 공동황제로 즉위한 직후, 루트비히는 베네벤토의 롬바르드인 공작 라델히스 1세, 살레르노의 공작 사이코눌프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루트비히의 중재는 롬바르디아 공국을 분할하여 베네벤토의 라델히스 1세와 사이코눌프가 나눠 갖고, 살레르노를 독립 공국으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루트비히의 중재를 거부했고, 라델히스 1세에게는 당시 사라센인 용병이 없었다. 이 무렵 시칠리아에는 사라센 군이 쳐들어왔지만 시칠리아는 겨우 사라센 군을 격퇴하였다.
851년 엥겔베르가와 결혼하여 이탈리아의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황제 대관식 해에 이탈리아 남부로 진군하여 경쟁하던 베네벤토 공작 라델키스 1세와 시코눌프를 강제로 화해시켰다. 그의 중재로 롬바르디아 공국이 분열되었고, 라델키스는 수도로 베네벤토를 가지는 몫을 얻었으며, 살레르노는 시코눌프에게 독립 공국으로 주어졌다. 이제 평화를 얻은 라델키스는 아글라브 왕조 용병들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자, 기꺼이 그들을 황제에게 배신했다. 루이 2세는 그들에게 공격을 가했고, 그들은 학살당했다. 그 후 그는 교황 레오에 대한 일부 비난을 잠재우고 파비아에서 국회를 열었다. 그는 853년 12월, 3년 전 자신이 임명했던 왕조를 폐하고, 권력을 찬탈한 섭정 페테르를 살레르노 공작으로 확정했다. 855년 9월 아버지 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그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2. 3. 북부 이탈리아 제어
851년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에 독립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850년부터 866년까지 사라센의 침입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된 롬바르디아 왕국의 정국 혼란을 수습하고 독자적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그는 즉위 기간 내내 로마 지역 문제에 신경 써야 했고, 다른 프랑크 지역의 주권은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다.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남부로 내려가 베네벤토 공작 라델히스 1세와 살레르노 공작 시코눌프 사이에 협상을 요구했다. 이탈리아인 루트비히의 중재로 롬바르디아 지역이 분할되었고 라델히스 1세에게는 그의 베네벤토 영지 이외에 롬바르디아를 분할한 일부 영지를 주고, 살레르노 공작 시코눌프에게는 살레르노를 독립 공국으로 승인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양자간 갈등을 봉합하였다.
851년 10월 5일 수포니드 가문 출신 스폴레토 공작 아델히스 1세의 딸인 낭트의 엔겔베르가와 결혼하였다. 그의 처가인 수포니드 가문과, 그밖에 이탈리아의 다른 귀족 가문인 운로키데스 가문은 이탈리아 내 카롤링거 왕조의 주요 가신 가문들이었다. 그밖에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는 프랑크의 귀족 가문을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로 일부 이주시켰다.
루트비히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시키고, 북부 지역을 제어하려 하였다. 이브레아의 후작인 베렝가르나 스폴레토의 수포니드 가문 출신 공작들, 토스카나의 아달베르트 1세 등은 카롤링거 왕가의 봉신임을 고백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약하였다.
2. 4. 황제 즉위 이후
855년 아버지 로타르 1세가 퇴위하고 프륌 수도원에 들어가면서,[19] 그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의 영토가 이탈리아에 한정되어 불만이 많았고, 다른 프랑크 왕국들에 대한 종주권은 포기하였다.846년 이슬람 군대가 로마를 침입하여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로타르 1세는 이탈리아로 침입하는 이슬람 세력에 대처해야 했다.[12] 871년 바리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했지만, 남이탈리아에 침입하는 이슬람 군대에 대처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협력이 필요했기에, 873년 남이탈리아에서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12]
그는 이탈리아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이탈리아 귀족들의 다툼과 사라센의 침략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2. 4. 1. 동생 샤를, 로타르 2세와의 관계
855년 아버지 로타르 1세가 사퇴하고 프륌 수도원에 들어가면서[19] 루트비히 2세는 단독 황제가 되었지만, 이탈리아에 한정된 영토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독일왕 루트비히와 연합하여 동생인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와 대머리왕 카를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858년 니콜라오 1세를 새 교황으로 임명하는 데 성공하자 동생 로타르 2세와 화해하고, 동생의 이혼을 돕는 조건으로 영토 일부를 양도받았다.863년 셋째 동생 샤를이 죽자 루트비히 2세는 프로방스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 프로방스 국왕 직책과 부르고뉴, 리옹, 비엔나 등을 차지했다. 샤를은 후계자로 로타르 2세를 지목하고 죽었으므로 로타르 2세는 반발했다. 루트비히 2세와 로타르 2세의 갈등은 루트비히 2세가 부르고뉴 일부를 받는 선에서 합의로 종결되었다. 이듬해에는 동생 로타르 2세의 이혼 문제로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충돌했다.
루트비히 2세는 로타르 2세의 이혼을 합법화한 독일 대주교들을 지지했고, 이를 반대하는 교황 니콜라오 1세를 응징하고자 864년 2월 군대를 이끌고 교황에게 면직된 대주교들과 로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열병에 걸려 교황과 휴전하고 로마를 떠나야 했다. 이후 로타르 2세와 화해하고 쥐라산맥 남쪽 땅을 선물로 받았다. 864년 로타르 2세는 루트비히 2세에게 샤를의 영지 일부를 요구했고, 루트비히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샤를의 영토 중 부르고뉴를 로타르 2세에게 넘겨주었다.
864년 로타르 2세가 발트라다와 재혼하려 하자, 루트비히 2세는 로타르 2세의 재혼에 찬성하여 로마를 방문,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로타르 2세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강요하였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죽었을 때 루트비히 2세는 병을 앓고 있어 로타르 2세의 영토 처리 문제에 개입하지 못했고, 삼촌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이 나눠 갖게 되었다. 대머리 카를은 로타링기아의 동쪽 베스트팔리아를, 독일인 루트비히는 프랑코니아(프랑켄)을 차지했다.
863년, 동생 샤를이 상속인 없이 사망하자, 그의 영토는 루트비히 2세와 로타르 2세 사이에 분할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아를, 엑스, 앙브랑의 각 주교구와 프로방스 왕위를 획득하여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하였다.[9] 869년에는 동생 로타르 2세도 적출자 없이 사망하였으나, 이때 루트비히 2세는 이슬람 군과의 전투 때문에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었고, 로타르 2세의 유산인 로타링기아(로렌)는 그의 삼촌인 서프랑크 왕 샤를 2세에게 빼앗겼다.[9] 이후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도 상속권을 주장하여, 870년의 메르센 조약에서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 사이에 분할되었다.[14]
2. 4. 2. 교황과의 갈등
864년 루트비히 2세는 동생 로타르 2세의 이혼 문제로 교황 니콜라오 1세와 갈등을 빚었다. 루트비히 2세는 로타르 2세의 이혼을 인정한 독일 대주교들을 지지했고, 교황 니콜라오 1세가 이혼을 반대하자 864년 2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갔다. 이때 교황에게 면직된 대주교들도 동행하였다.[19] 그러나 루트비히 2세는 열병에 걸려 교황과 휴전을 맺고 로마에서 철수해야 했다.[19]이후 루트비히 2세는 로타르 2세와 다시 화해하였고, 로타르 2세는 쥐라산맥 남쪽의 땅을 루트비히 2세에게 주었다. 864년 로타르 2세는 루트비히 2세에게 샤를의 영지 일부를 요구했고, 루트비히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샤를의 영토 중 부르고뉴를 로타르 2세에게 넘겨주었다.
같은 해, 로타르 2세가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발트라다와 재혼하려 하자 루트비히 2세는 로타르 2세의 재혼에 찬성하여 로마를 방문, 교황 니콜라오 1세에게 로타르 2세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강요하였다.
2. 5. 사라센의 침공
866년부터 871년까지 사라센 족은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바리 일대에 정착하고 아드리아만까지 영향력을 확장하며 이탈리아 남부 및 지중해 일대를 약탈했다. 루트비히 2세는 사라센의 침략에 맞서 교황 요한네스 8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병력과 함대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다.869년 동생 로타르 2세가 사망했지만, 루트비히 2세는 사라센과의 전투 때문에 로타르 2세의 유산 상속에 참여하지 못했다. 결국 로타링기아는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에게 분할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영토 문제로 전쟁을 벌였지만 실패하고, 베네벤토 공국을 북부 이탈리아로 편입하는 선에서 종전해야 했다.
871년 8월, 루트비히 2세는 베네벤토에서 사라센 원정을 준비하던 중 베네벤토 공작 아델히스에게 감금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사라센의 대규모 침공이 시작되자, 아델히스는 루트비히 2세를 풀어주고 다시는 베네벤토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의 질서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이탈리아 제후들과 남부 이탈리아를 황폐화시킨 아글라브 왕조에 맞서 싸웠다. 866년, 무슬림 격퇴를 위한 지원을 요청한 후 침입자들을 격파했지만, 함대 부족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2. 5. 1.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과 갈등
866년부터 871년까지 사라센족이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아드리아만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고 약탈하자, 루트비히 2세는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1세와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대응했다. 루트비히 2세는 직접 프랑크족 보병과 기병, 동로마 제국 지원군을 이끌고 바리 요새를 공략했다.[20]868년 3월, 루트비히 2세는 바실리우스 1세와 자신의 딸과 그의 아들 간의 혼담을 주고받았으나 결렬되었다. 871년, 바실리우스 1세의 지원으로 바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루트비히 2세의 황제 지위를 놓고 갈등이 발생했다. 바실리우스 1세는 루트비히 2세를 "프랑크 왕"이라고만 칭했고, 루트비히 2세는 스스로를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orum'')로 칭하며 맞섰다. 동로마 제국은 샤를마뉴의 황제 지위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루트비히 2세를 "프랑크의 황제"(Basileus Phrangias)라고 불렀다. 서프랑크 왕국에서도 그를 "이탈리아 황제"(imperator Italiae)로 칭했다.[12]
839년 이후 남이탈리아의 베네벤토 공국에서는 계승 분쟁이 발생했고, 846년에는 이슬람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기도 했다. 847년 루트비히 2세는 이슬람교도들을 베네벤토에서 몰아냈고, 849년에는 베네벤토 후국 분할을 중재하여 계승 문제를 해결하는 듯했으나,[13] 이후에도 이슬람 군대의 침입은 계속되었다. 871년 바리를 탈환했지만, 동로마 제국의 협력이 필요했기에 873년 남이탈리아에서 바실리우스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12]
2. 6. 베네벤토 공국과의 관계
루트비히는 타렌툼 및 이탈리아의 서남부 해변에서 사라센족을 몰아내고 칼라브리아 지역 등을 사라센의 영향력에서 회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베네벤토 공국의 공작 아델히스는 사라센 용병들을 고용하여 그에게 저항했다. 871년 8월 루트비히는 군사를 일으켜 베네벤토의 공작 아델키스와 싸웠지만, 같은 달 베네벤토 공국의 육군 병사에 의해 포로가 되었고, 다시는 공작령을 침범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 뒤에야 풀려났다.[21] 또한 이탈리아 북부의 일부를 베네벤토 공국에 넘겨주어야 했다.루트비히가 베네벤토에 억류되어 있을 때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고,[21]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와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는 이탈리아로 군대를 보냈지만, 생존해 있던 루트비히는 그들의 군대를 물리쳤다.[22] 872년 5월 18일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루트비히에게 다시 제관을 수여한 뒤, 그 서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힘입어 그는 카푸아의 사라센족을 몰아내고, 다시 베네벤토 공작을 응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북부 이탈리아로 물러났다.
871년 8월, 그는 추가적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베네벤토로 들어갔다가 궁전에서 공격을 받고, 베네벤토 공작 아델키스에게 약탈당하고 감금되었다. 루이 2세의 포획은 당대의 짧은 시인 ''루이 황제의 포로 생활에 관한 운율시(Rythmus de captivitate Ludovici imperatoris)''에서 애도되었다. 새로운 아글라브 왕조 군대의 상륙으로 아델키스는 한 달 후 그의 포로를 석방해야 했고, 루이는 이러한 모욕에 대해 복수하지 않고 군대와 함께 베네벤토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맹세에서 풀려났고, 872년 5월 교황 아드리아누스 2세(Pope Adrian II)에 의해 두 번째로 황제로 즉위하였다.[8]
루이는 아글라브 왕조에 대해 더 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살레르노 공방전을 해제하고 그들을 카푸아에서 몰아냈지만, 아델키스를 처벌하려는 황제의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루트비히는 베네벤토 원정을 준비하던 중 875년 8월 12일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근처 게디(Ghedi)에서 죽었다.
2. 7. 최후
872년 5월 18일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루트비히에게 다시 제관을 수여하고, 그가 베네벤토 공국에 억류되었을 때 했던 서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하였다.[22] 이에 힘입어 루트비히는 카푸아의 사라센족을 몰아내고 다시 베네벤토 공작을 응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북부 이탈리아로 물러났다.875년 8월 12일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근처 게디(Ghedi)에서 루트비히는 베네벤토 원정을 준비하던 중 사망하였다.[21] 아들이 없던 루트비히는 유언으로 독일인 루트비히의 아들이며, 자신의 처남이자 사촌인 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21] 그의 시신은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 교회 본당 왼쪽 벽에 안치되었다.

루트비히 사후, 적통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에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가 알프스를 넘어 그해 12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차지하고 돌아갔다. 삼촌 독일인 루트비히와 사촌 카를만은 반발했고 독일인 루트비히, 대머리 카를이 연이어 사망할 때까지 내전은 계속되었다. 루트비히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였다고 한다.[23]
루트비히가 손에 넣으려던 이탈리아 동남부 바리 일대는 875년 이후 이탈리아의 왕좌를 차지했던 그의 후임자들이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해, 결국 동로마 제국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24] 또한 칼라브리아는 그의 사후 바로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에 편입되었다.
3. 가계
- 조부 : 루트비히 1세 경건왕
- 부왕 : 로타르 1세(795~855): 중프랑크 왕(818~855), 신성 로마 황제(840~855)
- 어머니 : 이르멘가르트
- 누이 : 이르멘가르트
- 매형 : 바이에른의 카를만 - 숙부 독일왕 루트비히의 아들이자 사촌 형제
- 동생 : 로타르 2세(835~869), 로타링기아의 왕
- 동생 : 프로방스의 샤를(?~863), 부르고뉴와 프로방스의 왕(856~863)
- 숙부 : 페펭(797~838) (아키텐의 왕 피핀)
- 숙부 : 루트비히 2세(805?–875?, 876?) : 바이에른의 왕(817~875), 동프랑크 왕(843~875), 루트비히 독일왕
- 숙부 : 대머리 카를 (카롤루스 2세, 823~877) : 서프랑크 왕(840~877), 신성 로마 황제(875~877)
- 부인 : 엥겔베르가(Engelberga)(? - 896/901년 3월 23일 사망)
- * 아들 : 루트비히 (요절)
- * 아들 : 카를 (요절)
- 부인 : 이르멘가르트(Irmangard) - 숙부 독일왕 루트비히의 딸이자 사촌 여동생. 사촌 바이에른의 카를만에게 여동생을 시집보내 겹사돈을 맺음.
- * 딸 : 기셀라(Gisela, 852 또는 855 ~ 868년 4월 28일) - 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의 수녀원 원장
- * 딸 : 이르멘가르트(Ermengard de Italy, 852 또는 855 ~ 896) - 보소와 결혼
- ** 외손자 : 맹인왕 루트비히
- 부인 : 스폴레토의 이르멘베르가(Irmanberga, 830 ~ ?)
- 기타
- * 서자 : 카를로만(Carloman)
851년 10월 5일, 루이 2세는 스폴레토의 아델키스 1세(Adelchis I of Spoleto)의 딸인 엥겔베르가(Engelberga)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기셀라(Gisela) | 852/855년 | 868년 4월 28일 이전 | 브레시아의 산 살바도르 수도원 원장 |
에르망가르드 | 852/855년 | 896년 | 보소와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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